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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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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선우 댓글 1건 조회 1,538회 작성일 09-11-11 09:09

본문

 
 아무나 주기도문을 하는 것이 아니다.

  주기도문을 주의 기도문으로 착각하거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으로 여겨 1000번을 외워서 폐병을 고쳤다거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사례를 들을 수가 있다. 이 기도문의 위력은 여러 가지 사례로 능력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주기도문이 외우거나 공동으로 합창하듯이 읊는 기도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기도문에서 숨은 의미와 비밀은 지면상으로 할애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핵심 부분만 거론하고자 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문구에서 모든 열쇠가 들어가 있는데 ‘하늘’이란 의미는 단순히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이란 의미가 아니다. ‘하늘’이란 단수적인 의미가 아닌 복수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 어느 ‘하늘’을 의미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원문에서 ‘하늘’이 아니라 “하늘들 안에”(o` evn toi/j ouvranoi/j 호 엔 토이스 우라노스 )이란 복수적인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대부분 주기도문을 하던 분들이 어느 하늘을 의미하고 있는지 알고 하는지 아니면 의식하지 않고 남들이 하니까 따라 했는지부터 점검해야 할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높고 높은 하늘도 하늘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외적인 세계의 하늘을 만드신 것뿐만 아니라 내면세계의 하늘도 함께 만드신 것을 알고 나면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도 만드셨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세계의 사물도 만드신 것을 성경에서 암시하고 있는데 그것을 묵과하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우주만물이 우리 눈에도 보이지만 내 마음 속에도 창조하신 것을 깨달으라고 기록한 책이 바로 창세기인 것이다. 이스라엘 성지에 가서 신앙의 유적지를 관광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내면의 세계 속에 이루어진 성지순례를 하는 것이 더욱 값진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공부를 하는 분들에게 단순히 성경의 지식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값비싼 성지순례를 하는 것이라고 인식하는 그들 가운데 실감을 갖는 분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분도 있다. 왜냐하면 눈이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 보고 해야 하는데 몸에 와 닿는 직접적인 체험을 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을 실감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서 ‘하늘’이란 사건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창세기 19:24에 “하늘 곧 여호와”라는 문구 앞에서는 하늘이 사물적인 하늘도 있지만 존재적인 하늘 곧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하고 있다면 내 안에 그 분이 존재하고 있음을 경험한 사람만이 주기도문을 하는 것이다. (시 115:16)

  내 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늘’의 존재로 내재하심을 믿고 경험한 사람만이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며 그 분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10:30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의거하여 예수님도 하늘이라고 할 수 있다.(요 17:9~11, 21~23)

    그렇다면 원어에 “하늘들”이라고 표현한 것이 정확한 것이다. 즉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내 안에 내주하신다면 내 안에 “하늘들”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 사실을 설명하면 어떻게 그 분들이 내 안에 있을 수 있는지 의아해 하는 분들을 자주 만난다.
 
  내 안에 두 분, 사실을 한 분이면서 존재적인 의미에서는 두 분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분들이 내 안에서 내주하시는 상태가 바로 “우리”라는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하여 하나가 된 상태를 주기도문에서 말하는 “우리”라는 차원을 인식하는 사람만이 주기도문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기도문을 어느 종교에서 주문이나 간단한 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아니면 남들이 하니까 하는 기도문도 아님을 절실하게 깨달아야 한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우리”라는 상황을 맛보지 않고 하는 주기도문은 종교의식처럼 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또한 주기도문은 예배형식에 따르기 위해서 하는 기도문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어느 며느리가 예수를 믿게 되어 그 은혜로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어 교회에 가서 예배 시간에 주기도문을 하는 것을 온 가족들에게 가르쳤는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따라 하라고 하니까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하늘에 계신 우리 사돈”이라고 하고, 자기 남편을 “하늘에 계신 우리 장인어른”이라고 하며, 자기 자녀들은 “하늘에 계신 우리 할아버지”라고 웃지 못하는 헤프닝도 과거에 있었다.

    고전 6:17에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하신 사도 바울의 교훈적인 말씀도 주 하나님 아버지,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존칭을 할 수 있는데 성령은 주 성령이라고 존칭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주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한 자는 성령을 받은 상태라는 의미를 안다면 성령을 받는 차원이 아니라 주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하는 “주”는 나의 주인을 의미하며 나의 남편과 신랑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사 54:5, 렘 3:24, 호 2:19, 20, 마 25:1~13) 이처럼 하나님과 예수님은 나와 결혼하여 연합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 9:15, 요 3:29, 계19:7, 21:2, 9, 사 61:10)

  고전 3:23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은 그 어느 누구의 소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성 속에서 하나가 된 것을 피력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내가 누구의 소유로 알고 있는 것이 너무나 아쉬운 부분이 많이 있다. (요 17:6, 9~10, 16:15, 고후 10:7)

  이렇게 내 안에 주 하나님 아버지,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내재하심을 깨닫는 순간이 바로 하늘들이 되는 순간이며, 우리라는 상태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생이며 구원이고, 천국이며 거룩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창세전에 이루어진 영생복락이 바로 이렇게 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인데 다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고 누렸는지에 대한 관심을 그다지 많지 않다. 다만 이 땅에서 나와 주님과 더불어 연합하여 하나가 된 삶을 얼마나 누렸는지에 대한 관심은 엄청 많이 갖고 계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내 안에 계시는 주님과 한 몸이 되어 살아가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형성되는 것에 기대가 크다.

  목사가 되고 선교사나 목회자가 되는 것, 제자가 되는 것이나 사명자가 되는 것, 직분을 받아 얼마큼 충성했나에 관심보다는 자신 속에 주님이 계신 것을 발견하고 그 분과 한 몸이 되도록 십자가에서 피 흘려 나와 함께 죽으시고 삼일동안 장사지내었다가 부활하시어 연합되게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 주신 것을 몸소 체험하고 그 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큰 관심을 갖고 계신다.

  내가 이 땅에서 얼마나 기도를 하고 섬기며, 성경을 읽고 그 말씀대로 살았는가에도 관심을 갖고 계시겠지만 내 안에 내주하시는 주님과 한 몸이 되어 하나 됨 속에서 하나님께서 걸어가게끔 마음의 토대를 만들어 놓는 것이 내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시기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방언, 예언,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소유하려고 얼마나 발버둥을 치면서 기도하고 충성헌신봉사하고 있는지....... 고전 13장에 사랑을 다른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주님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방언이며, 예언이고,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아는 것이며,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인데 다른 것에 추구하고 있으며 쫒아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뜻임을 알아야 하며 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는데 다른 것을 이루려고 몸부림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게 여시겠는가? 이것이 바로 천국의 열쇠인데 다른 것이 천국의 열쇠로 알고 있으니 말이다.

  주기도문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주님과 한 몸이 되어 하나가 된 상태에서 하는 것이 바로 주기도문이다. 주기도문을 하나도 틀리지 않고 외우는 것이 아니며 헬라어나 히브리어로 외우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속에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내용을 분명히 알고 실천하며 전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퍼옴(이준호목사 칼럼)

댓글목록

이성식 님의 댓글

이성식 작성일

그래요!  (권사님께서도 창골산 봉서방 카페에 들리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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